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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별 술문화

noon2dy 2010. 10. 26. 08:31

 




힘깨나 쓰는 건설업 종사자들은 대표적 술꾼이다.
그러나 샌님 같아 보이는 금융권 사람들 앞에선 족탈불급이다.
같은 금융권 주당(酒黨)이라도 증권맨이 은행원을 압도한다.
왜 그럴까?
 

시인과 소설가 중에 누가 술을 더 잘 마실까. 소설가 김종광씨에게 물어보았다. 단연 시인이라고 답한다. 술을 마시면 영감을 얻을 수 있고, 그 영감이 글 쓰는 데 힘이 되기도 하는 건 시나 소설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소설가는 영감만으로 달리기에는 분량이 장거리여서 술을 많이 마시면 작업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다. 개인마다 차이가 있겠으나 시를 쓰고 나면 마음이 고단하고, 소설을 쓰고 나면 몸이 고단해서 술을 마시는 건 아닐까.

목수와 은행원을 견주면 누가 술을 더 잘 마실까. 왜 뜬금없이 목수와 은행원을 비교하느냐고? 내가 막걸리학교를 운영하면서 가장 눈에 띄는 직업군이 건축업과 금융권 종사자들이기 때문이다. 이 두 부류의 직업군 종사자들은 막걸리학교 6기가 진행되도록 기수마다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

건축업 종사자들은 육체노동을 주로 해서 땀을 많이 흘리기 때문에 술을 가까이 두고 작업하는 경우가 많다. 그때 곁들이는 술은 작업에 방해되지 않는 도수 낮은 술이다. 이른바 농부들이 새참으로 마시던 술과 닮았다.

물론 건축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전문분야에 따라 술 마시는 양상이 또 다르다. 힘을 많이 쓰는 철근공은 소주를 선호하는 편인데, 작업할 때는 맥주를 좋아한다. 철근공은 기둥을 세우거나 바닥의 철근 구조물을 설치하는 일을 하는데, 대개 그늘 없는 뙤약볕 아래에서 작업을 한다. 자연 땀을 많이 흘린다. 그래서 일하는 중에는 갈증을 푸는 맥주를 찾는다.

반면 실내 작업이 많은 목수들은 막걸리를 좋아한다. 아침 일찍 출근길에 막걸리 두 통을 가방에 담아 와서 오전 오후 한 통씩 비우면 피로도 풀리고 힘도 솟는단다. 이런 연유 때문인지 인테리어 종사자, 바이올린 만드는 악기장, 무대 설치 디자이너, 건축회사 비서 등 건축계 사람들이 막걸리학교를 찾아오는 것이 이제는 당연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금융권이 ‘말술’인 까닭

그런데 내가 보기에 건축계 사람들을 능가하는 술꾼 집단이 은행원이다. 이들은 마치 잘 훈련된 병사들처럼 술 앞에서 호전성을 발휘한다. 일전에 한 투자증권회사 연수원에서 강연을 하다가 설문조사를 해봤다.
지점장급 130명 정도가 모인 자리였는데, 그들 중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2명만이 손을 들었다. 폭탄주는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가 ‘말’ 줄 안다고 했다. 이곳에는 금주하는 종교인도 없고, 한 잔 술에 얼굴이 발개지고 숨이 가빠지는 사람도 없단 말인가. 나로서는 신통할 따름이었다.

 


같은 술꾼이라도 직업에 따라, 같은 직업이라도 전문분야에 따라 주량과 주법이 미묘하게 다르다.

오히려 궁금한 것은 술을 안 마신다는 두 사람이었다. 그 둘에게 술을 마시지 않고도 지점장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을 물어봤다. 한 사람은 그 전 해에 심장수술을 받았다고 했다. 일찍이 시인 조지훈이 주도 18단을 나누면서 최상급으로 분류한 주도 8단, 다시 말해 술을 보고 즐거워하되 마실 수 없는 관주(觀酒)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었다. 다른 한 사람은 따뜻한 감성의 소유자로 다른 이에게 멘토 노릇을 잘하는, 언변이 좋은 인물이었다. 연수원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여직원에 따르면 뭇사람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분이었는데, 아주 잠깐 만났는데도 자신에게 기분 좋은 말 한 마디를 건네더라는 것이다. 굳이 술이 아니더라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풀어나갈 줄 아는, 나름의 탁월한 처세술을 지닌 사람이었다.

건설업종과 금융업종을 모두 거느린 L그룹의 연수원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연수원 관계자들도 처음에는 당연히 건설업종 사람들이 금융업종 사람들보다 술을 더 잘 마실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더란다. 금융업종 간부 100명이 연수원에 들어온 적이 있는데, 하룻밤에 폭탄주로 비워낸 양주병이 1인당 각 1병씩-이들은 술병을 헤아릴 때 ‘각 1병’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모두 100병이나 되더란다. 모두가 기겁할 이 전적에 건설업종 분야 사람들도 혀를 내두르더라는 것이다.

금융권 사람들은 왜 술을 잘 마실까. 막걸리학교를 다닌 40대 중반의 여자 은행원 출신 K씨와 얘기를 나눠봤다. K씨는 “세상에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은 없고, 마시다보면 모두가 술이 늘더라”고 했다. 그가 은행에서 일한 경험을 통해 터득한 사실이라고 했다. 그는 1980년대 후반에 투자금융회사에 들어갔다가 우루과이 라운드 여파로 1992년 회사가 증권사, 은행, 종금사 등으로 분산될 때 은행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 후 은행권이 통폐합되면서 투자금융사와 은행권에서 일하다 2000년대 초 퇴직했다. K씨는 직장을 옮길 때마다, 신입사원이 들어올 때마다 사발주 의식을 치렀단다. 대학생들이 신입생 환영회 때 한다는, 냉면그릇이나 밥그릇에 소주를 따라 마시게 하는 악명 높은 행사다.

은행은 창구에서 받은 돈을 1원 단위까지 똑떨어지게 정산한 뒤에야 하루 일과를 마칠 수 있다. 대리, 과장, 차장 라인을 거쳐 올라오는 결산이 맞지 않으면 틀린 부분을 찾아낼 때까지는 퇴근도 못 한다. 동그라미 하나를 잘못 찍어서 900만원이 9000만원이 되고, 현금 입출납한 돈이 어긋나는데 추적할 근거도 못 찾으면 연대 책임을 지게 된다. 이런 경우엔 실수한 창구 직원이 배상하는 돈보다 책임자급이 배상하는 돈이 더 크다. 수신이고 여신이고 잠깐이라도 긴장의 끈을 놓치면 실수가 생겨나고 작은 실수가 큰 손실로 이어진다.

이렇다 보니 부서장은 직원들을 언제나 잘 통솔하고 점검해야 한다. 직원들을 통솔하는 일은 업무 시간에만 하는 것이 아니다. 퇴근 후 술자리에서 긴장도 풀어주고 결속도 다져둬야 한다.

 

술자리에선 좌장만 쳐다보라

K씨가 언젠가는 술을 전혀 못 마시는 남자직원을 본 적이 있다.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지고 화장실로 달려가 토하곤 했다. 그런데 1년이 지나자 그 직원은 소주 1병을 거뜬히 마시고, 후배 신입사원에게 “나도 1년 전에는 그랬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냐”라며 술을 권하더라고 했다.

더욱이 수신은 7시, 여신은 10시에 업무가 끝나는 일이 허다해 술을 마실 일이 잦다고 했다. 회식도 많은 편인데, 목표달성을 위한 캠페인을 벌이거나 캠페인으로 상금을 받을 때, 전출입과 승진 인사가 있으면 전체 회식을 하곤 한다. 전체 회식은 한 달에 보통 한두 차례 있는데, 술을 안 마실 수가 없다고 한다. 술을 거부하면 분위기를 깨기 때문이다. ‘성격이 독특하다’는 말을 들으면서 상사의 눈 밖에 나기 십상이라는 것. 물론 2차에도 데려가지 않는데 이것이 업무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업무에서 똑같은 실수를 저질러도 회식 때 우정을 다진 사이에선 “일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하고 넘어가지만, ‘회식 충성도’가 낮은 사람은 꼬투리가 잡히거나 인간적으로 무시하는 말을 듣기도 한단다. 그런 후환을 없애려면 고꾸라지고 토하더라도 주는 술을 다 받아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회식 비용은 모두 회사의 공금으로 댄다. 은행권에서는 캠페인과 행사 실적에 따른 포상이 돈으로 내려와 부서마다 적립된 돈이 얼마씩 있다.
또 부서별로 책정된 야식비, 회의비, 문구비 등을 다 쓸 수 없어서 영수증 처리해 털어내고 비자금으로 200만~300만원씩은 여퉈둔다. 작은 금융 사고는 이 돈으로 메우기도 하지만, 대체로 부서 회식비로 사용된다. 술 마실 여비가 든든한 편이다.


같은 금융권이라 해도 업무의 성격에 따라 술을 마시는 정도가 다르다고 한다. 투자금융권 부서장 P씨에 따르면 증권사와 은행권은 하늘과 땅 차이라고 했다. P씨는 “가령 여름휴가 전에 사둔 주식이 휴가 갔다 오니 20%가 날아갔다면 술을 안 마실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또한 증권사는 영원한 ‘을’로 접대를 해야 하지만, 대출권을 쥔 은행권은 갑의 처지라 대접받을 일이 더 많다고 한다. 증권사는 돈을 유치하기 위해 아쉬운 소리를 하는 집단이지만, 은행권은 아쉬운 소리를 듣는 집단이라는 얘기다. 이 때문에 증권사 직원들이 훨씬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술 접대도 많이 한다는 것.

그러면서 P씨는 “은행이든 증권사든 금융권의 술문화는 극히 가부장적”이라고 했다. 술 마시러 갈 때는 언제, 어디서, 무슨 술을 마실 것인지를 모두 좌장에게 의존한다. 좌장인 행장 또는 부장이 회를 안 좋아하면 1년 내내 회를 못 먹게 될 수도 있다.

또한 술자리에서는 누구보다 좌장이 즐거워야 한다. 친구들끼리 10명쯤 회식을 하면 가까이 앉은 사람끼리 삼삼오오 짝지어 대화를 나누겠지만, 금융권의 술자리에선 줄곧 좌장을 쳐다봐야 한다. 제3자가 보면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비민주적이겠지만, 금융권은 손실(리스크)을 막아야 하는 조직이기에 습관적으로 몸조심을 한다. 10원 하나 안 틀리게 톱니바퀴처럼 조직이 돌아가야 하니 좌장이 만든 폭탄주는 고량주에 맥주를 섞은 것이든, 소주에 고량주를 섞은 것이든 사양 말고 받아 마셔야 한다. 술자리는 한 배를 탄 운명공동체임을 확인하는 자리다. 술자리를 털고 일어날 때 좌장의 기분이 좋으면 좋은 술자리였다고 여긴다.

 

몸이 안 받으면 가슴으로 받는다

그래도 요즘에는 금융권 술문화가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외환위기 무렵엔 구조조정으로 바짝 긴장하고 조직의 위계를 잘 따라 술 못 마시는 사람도 죽기 살기로 마셨다면, 2002년 월드컵 이후엔 변화의 조짐이 생겼다는 것. 길거리 응원이라는 형태로 광장에서 스스로 에너지를 맘껏 발산하는 경험을 갖게 된 젊은층들은 술을 마시지 않고도 스포츠나 공연, 축제 관람 문화를 통해 서로 단결하고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에 따라 경기나 영화 관람으로 회식 술자리를 대신하자는 건의가 올라오기 시작했고, 부서장들도 재량권을 유연하게 행사했다. 40대 중반인 P씨는 30대 중반 시절과 비교하면 요즘은 2차 술자리가 많이 줄었고, 새벽 2~3시까지 이어지기 일쑤이던 회식도 12시 이전에 파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렇지만 점심에 밥을 먹자고 하면 진짜 밥이지만, 저녁에 밥을 먹자고 하면 술 마시자는 뜻이라는 건 여전하단다. 점심 때 간 음식점을 저녁에 다시 가도 식단이 다르다. 요즘은 안주가 나오기 전에 소주 한두 잔씩을 비운다. 속도전을 내려 할 때-자리를 빨리 털고 일어나기 위해, 회식비를 줄이기 위해, 빨리 취하기 위해…등 이유는 각각 다르다-는 소주와 맥주를 섞은 소맥 폭탄주를 돌린다. 좌장이 술잔을 돌리면 “아, 제가 먼저 돌렸어야 하는데…”라며 줄줄이 술잔을 받고, 술잔을 받은 사람들은 다시 술잔을 돌린다. 10명이 모이면 소주가 됐든 소맥이 됐든 기본이 10잔, 20명이 모이면 20잔을 마시는 일이 보통이다. 빈속에 술을 마시기 불편한 사람들은 눈치껏 음식점 주인에게 밥 한 공기를 달라고 해서 먹기도 한다.

 
금융권 종사자와 건축업 종사자가 다들 술을 잘 마신다고 하지만 그 분위기는 판이하다. 금융권 종사자는 정신적 스트레스 때문에도 술을 마시지만 인간관계와 접대 때문에 술을 마시는 빈도가 높다. 이에 비해 회사 대표가 아니고서야 목수들은 누군가를 접대할 일이 거의 없다. 그래서 대개 동료들끼리 술을 마시는데, 그 술 충동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개 자기 내부에 있다. 목수는 땀 흘린 자기 몸의 긴장을 풀기 위해 마시지만, 은행원은 조직이나 거래를 위해 마시는 셈이다.


금융권 사람들이 술을 잘 마시는 것은, 어쩌면 술 잘 마시는 사람들만이 살아남다 보니 빚어진 결과일 수도 있다. 어느 보험회사는 신입사원을 뽑을 때 사장이 참여하는 최종면접 날 새벽에 등산을 하고 내려와 체육대회(축구, 달리기)를 하고, 조를 짜서 정해진 시간 안에 텐트를 치고 걷게 하고, 저녁을 먹으면서 반드시 폭탄주를 마시며 발표를 시켜 면접을 치른다. 반드시 폭탄주를 마시게 하는 것은 ‘유능한 영업사원이 되려면 그 정도 관문은 통과해야 한다’고 믿는 사장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다.

굳이 폭탄주까지 마시게 한 뒤 면접을 치르는 이유를 인사담당자에게 물었다. 취한 상태에서 자기 의사를 표현할 줄 아는지 테스트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술 한잔했다고 객기를 부리거나 흐트러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취해도 자기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한번은 술을 전혀 못하는 지원자가 폭탄주를 받더니 “몸이 받을 수 없어서 대신 가슴으로 받겠습니다”라더니 술을 셔츠 속에 부어버리더란다. 그는 당연히 합격했단다.

 
잔 못 돌리는 게 막걸리 매력

이쯤 되면 한국 사회에서 영업을 주로 하는 업종 종사자들에게 술 실력은 토익 점수보다 더 중요한 필수항목이 아닌가 싶다. 막걸리학교를 다닌 증권사의 P씨에게 왜 막걸리에 관심을 갖게 됐느냐고 물으니 “술문화를 좀 바꿔보고 싶어서”라고 답했다. 회식을 할 때면 늘 “오늘은 소주를 각 1병씩만 하자”고 맹세를 하지만, 조금만 취하면 발동이 걸려 거푸 잔을 돌리게 된다는 것.

그런데 막걸리는 잔이 커서 쉽게 돌릴 수가 없더란다. 또 소주는 잔을 돌리다 보면 곧 취기가 올라 진지한 얘기가 잘 안 되고 술이 술자리를 끌고 가는 데 비해 막걸리는 잔 돌리기에 집착하지 않다 보니 대화가 잘 이어지더라고 한다. 와인처럼 비싸지도 않고, 취하기 전에 배가 불러서 그만 마시게 되고, 그러다 보니 2차 가자는 소리도 나오지 않는단다. 이런 이유로 부서장인 P씨는 직원들과 막걸리 회식을 하고 싶지만, 그가 근무하는 여의도에선 갈 만한 막걸리주점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술도 그렇고 세상일도 그렇고, 극히 개인적인 성향이나 기질 같아 보이는 것 중에는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직에 의해, 물질에 의해 조종당하는 것이 적지 않다. 나는, 또 당신은 왜 술을 마시는가. 무엇엔가 조종당하는 건 아닐까. 즐거워하며 마시는 술이 아니라면, 그때 마시는 술은 대체 무엇일까.